e-역사속에서 찾은 청렴이야기 답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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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역사속에서 찾은 청렴이야기 답안 [2024]
e-역사속에서 찾은 청렴이야기 답안 [2024]

e-역사속에서 찾은 청렴이야기 답안 [2024]

  • 문항수 : 25문항
  • 평가시간 : 60분
  • 시험종류 :최종평가
  • 출제방식 : 랜덤출제
  • 총 응시 가능 횟수 : 3회

e-역사속에서 찾은 청렴이야기 답안
e-역사속에서 찾은 청렴이야기 답안

이주국과 박순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군법에 따라 형벌을 받아 죽은 병사의 아들은 이주국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 2) 죽은 병사의 아들은 이주국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재차 이주국을 살해하려 하였고, 결국 나졸들에게 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 3) 박순은 당대 사람들에게“‘호사석재(好士惜才)’정신이 그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을 숨기고, 능력 있는 자를 돕기 좋아하였다.
  • 4) 이주국과 박순의 일화를 통해 공무 집행에 있어 대사소사를 가리지 않고, 그 책임을 다하여야 할 공직자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원한을 품었던 죽은 병사의 아들은 이주국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주국은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친 아들은 그 뒤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주국에 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 1) 그는 용모가 건장하고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 있고 부귀한 자에게 아첨하지 않아서 명망이 있었으나 그로 인해 반목할 때가 많아 여러 번 문신들로부터 횡포를 당하기도 하였다.
  • 2) 이주국은 죽은 병사의 아내와 아들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서 사랑하고 돌보기를 친자식과 같이 하여 먹고 입히는 것을 후하게 하고 아이가 자란 후에는 아내를 얻어주어 항상 곁에 머물게 하고 보살펴주었다.
  • 3) 이주국이 죽은 병사의 아내와 아들을 집으로 들여 보살핀 일화를 통해 그의 강직한 성품과 책임감 있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 4)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다 목숨을 잃은 병사의 아들은 자신과 어머니를 보살펴준 이주국을 아버지의 원수라고 여기고 살해계획을 세운다.

이주국은 죽은 병사의 아내와 아들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서 돌봐주려 했으나, 죽은 병사의 아들이 이주국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이주국은 죽은 병사의 아들을 보살피려 했지만 이후 죽은 병사의 아내와 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백인걸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청렴결백으로 백인걸은 선조 대에 청백리로 뽑히기도 했다.
  • 2) 백인걸은 친구에 대해서는 관대했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엄격했다.
  • 3) 단순히 그가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청렴결백하다고 백성들이 존경했다.
  • 4)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간, 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결백한 성품으로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릴 줄 알고, 국가의 시급한 과제를 직시할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주국과 박순에 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 1) 이주국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처벌을 내렸다. 그래서 비록 그 결과가 뜻하지 않던 바였지만, 그의 공무집행에 절차상의 문제는 전혀 없었다.
  • 2) 이주국이 청백리에 녹선되고, 공직자의 귀감이 된 이유는 작은 것 하나까지 책임감을 갖고 군법에 따라 병사를 처벌했던 그 태도에 있다.
  • 3) 1553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박순은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했다.
  • 4) 박순은 당대 사람들에게“‘호사석재(好士惜才)’정신이 그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을 숨기고, 능력 있는 자를 돕기 좋아하였다.

이주국이 청백리에 녹선되고, 공직자의 귀감이 된 이유는 공무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지고, 그 피해마저 책임을 지려는 태도에 있다.

 

'도덕성'에 대한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 1) 개인의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 2) 세계적인 기업의 인재상은 풍부한 지식과 경쟁의식이 높은 사람이 기준이 된다.
  • 3) 경쟁력의 제 3의 자질은 `청렴`으로, 인재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 4) 청렴의식을 내면화하는 좋은 방법은 청렴한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얻는 교훈이다.

세계적인 기업의 인재상은 더이상 지식이 많거나 경쟁의식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관련있는 것끼리 짝지어진 것은?

  • 1) 이약동 - 한라산신제단, 말채찍, 역적
  • 2) 이시백 - 기생, 평양서윤, 금갑옷
  • 3) 이약동 - 송덕비, 치사, 말채찍
  • 4) 이시백 - 연양군, 지중추부사, 수어장대
  • 5) 이약동 - 병자호란, 제주목관아, 소대기년

유의와 정약용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유의는 배다리와 거중기를 설계하는 등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 2) 정약용은 청렴한 태도로 백성들을 널리 살펴 정조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다.
  • 3) 유의는 오랜 기간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검소한 삶을 몸소 실천하는 태도로 일관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 4) 유의와 정약용의 태도에서 오늘날 공직자들은 청탁과 이권개입을 대하는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확인할 수 있다.

배다리와 거중기를 설계하는 등 실학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은 정약용으로, 그는 과학 기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주목하였다.

 

유근과 이덕형에 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 1) 훗날에 재상이 된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이덕형은 『오성과한음』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다.
  • 2) 국가 재정이 허약해지고, 수해와 가뭄이 들끓어 민란과 반란으로 몸살을 앓던 명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어렵사리 보낸 원군은 유근의 총명함에 매료되었다.
  • 3) 이덕형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정주(定州)까지 왕을 호위하였고, 명군의 파견을 성공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 4) 이덕형은 제호탕을 바친 첩의 의도를 의심하여 그녀를 내쳤다.

제호탕을 바친 첩의 총명함과 영리함이 예뻐보였으나, 나라의 안위가 위급하니 국가와 백성 외에는 마음 둘 여유가 없다며 첩을 내쳤다.

 

김시양과 심연원에 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를 읽고 나눈 대화이다. 맞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 하하: 공무를 집행할 때에는 사위의 요청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김시양의 태도를 보면 얼마나 강직했고, 대단한 성품을 지녔는지 알 수 있어.

- 홍철: 사위의 간청에도 냉정했던 것을 보아하니 평소 김시양과 사위는 사이가 안좋았던 것 같아.

- 길: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경복궁을 복원한 관리인을 크게 꾸짖은 것은 두번째 화재로인해 조정의 위세가 많이 무너졌는데 꾸미는 것에 시간낭비를 했기 때문이야.

- 형돈: 아냐, 국법 상 오직 내전의 침실에만 비단을 사용하는 것인데, 하물며 관청건물에 비단을 쓴것은 공직자로서 너무 사치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이야.

  • 1) 하하, 형돈
  • 2) 형돈, 홍철
  • 3) 하하, 길
  • 4) 홍철, 길

정약용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 1) 16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인사청탁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 2) 올곧은 성품은 주변과의 잦은 마찰을 불러왔고, 주변의 공격을 받곤했다.
  • 3) 유배지에서도 학술활동에 매진해『맹자요의』, 『흠흠신서』,『경세유표』등을 저술했다.
  • 4) 배다리 설계, 거중기 설계 등 과학 기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백성들을 위한 의료 기기에 대한 연구에 매진했다.

정약용은 배다리 설계, 거중기 설계 등 과학 기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실생활에 응용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이순신은 노량해전 전투에서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 2)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둔전을 일구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 3) 이순신은 직속상관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뜰 안의 오동나무를 베고, 심부름꾼을 극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 4)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으로 이순신은 유배 생활을 하는 등 험난한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이순신은 직속상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소유물에 함부로 손 댈 수 없음을 엄중히 알리며 심부름꾼이 빈손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보기를 읽고 해당 내용과 관련있는 것은 고르시오.

[통영시의 대표적인 성지로, 1592년 8월 14일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해상주도권을 다툰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함으로써 해상주도권을 장악하여 식량보급로를 확보하고 수륙병진작전을 전개하려던 일본 수군의 전의를 상실케 한 임란의 최대승첩지인 이곳인 이 곳은 성웅 이충무공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거룩한 호국의 얼과 높은 뜻을 선양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 1) 충렬사
  • 2) 장성호
  • 3)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 4) 이순신공원
  • 5) 백양사

이순신공원(구, 한산대첩기념공원)은 통영시의 대표적인 성지로, 1592년 8월 14일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해상주도권을 다툰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함으로써 해상주도권을 장악하여 식량보급로를 확보하고 수륙병진작전을 전개하려던 일본 수군의 전의를 상실케 한 임란의 최대승첩지인 곳이다. 이순신공원은 성웅 이충무공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거룩한 호국의 얼과 높은 뜻을 선양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김시양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김시양은 기억력도 뛰어나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고 한다.
  • 2) 사위의 부탁을 받고 죄를 지은 사위의 숙부를 선처해주었다.
  • 3) 사돈 지간마저 국무의 절차를 엄중히 밟은 그의 태도에서 공무원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일처리를 배울 수 있다.
  • 4)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귀양을 가기도 했다.

김시양은 사위로부터 사위의 숙부를 선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사위 하나 때문에 국법을 폐할 수는 없다며 형을 집행하였다.

쌍문동 친구들은 유의와 정약용의 역사적 청렴이야기를 공부하고 토론을 나누고 있다. 옳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 정팔: 자고로 공무원이라면 정약용 처럼 오랜기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인사청탁에 흔들리지 않는 강직한 마음을 가져야해!

- 동룡: 맞아, 또 정약용처럼 오랜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검소하고 신중한 언행으로 자기 관리를 해야하지!

- 택이: 난 두 사람의 태도에서 공직자들은 청탁과 이권개입 등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바람직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느꼈어.

- 선우: 유의의『목민심서』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지!

- 보라: 나도 유의가 유배생활동안 그런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저술한 『맹자요의』, 『흠흠신서』,『경세유표』를 보고 배운 바가 많아!

  • 1) 정팔,동룡
  • 2) 선우,보라
  • 3) 택이,보라
  • 4) 동룡,선우
  • 5) 정팔,택이

오랜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검소하고 신중한 언행으로 자기 관리를 한 사람은 유의이다.
『목민심서』, 『맹자요의』, 『흠흠신서』,『경세유표』를 저술한 사람은 정약용이다.

 

다음 내용 중 옳지 않은 것은?

  • 1) 최부는 친 아우같은 송흠이 사행심에 빠져 공직자의 정신에 어긋나게 될까 염려되어 그를 지탄하였다.
  • 2) 최부와 송흠은 ‘삼마태수(三馬太守)’로 불릴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았으며, 청백리의 표본이다.
  • 3) 최부와 송흠의 일화에서 공무원이 지녀야할 예산과 공용물의 올바른 사용의 청렴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 4) 최부는 역마를 타고 자신을 찾아 온 송흠을 꾸짖으며 공용물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였다.

송흠은 ‘삼마태수(三馬太守)’로 불릴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았으며, 1538 청백리에 올랐다.

 

다음 중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은 것은?

  • 1) 조선시대의 ‘선비 ’개념은 지금 세대에게 ‘품성이 바른’ 또는 ‘도덕적인’이라는 개념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지침서가 되고 있다.
  • 2) '전통(傳統)'이란 세대를 거쳤음에도 여전히 가치 있는 것으로서 보존되어 온 유산으로, 전통이라 일컫는 것들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갖는 문제의식에 관계될 가치기준과는 독립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 3) '복고'와 '전통'이라는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유의미할 수 있도록 재발견, 재창조 되어 왔으며,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렴’의 개념을 들 수 있다.
  • 4) '청렴’과 같은 도덕성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경쟁력의 한 요인으로 국가와 기업에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1. 현대에서 선비란 '고리타분한', '융통성이 없는'이라는 개념으로 희화화 되어 쓰이고 있다.
2. 전통이라 일컫는 것들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갖는 문제의식에 관계될 가치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3.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빈’의 개념을 들 수 있다.

 

백인걸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선조 대의 인물로 모든 관료를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외람되고 거짓된 것을 금하는 대사헌, 대사간 등의 청직(淸職)에 몸담았다.
  • 2) 일흔 한 살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의 교리라는 명예로운 직책에 이르렀다.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의에 살고 의에 죽는’ 백인걸의 태도가 인정받은 결과였다.
  • 3) 청렴결백으로 백인걸은 선조 대에 청백리로 뽑혔으나 자신과 친구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 4) 결백한 성품으로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릴 줄 알고, 국가의 시급한 과제를 직시할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백성들이 존경했다.

백인걸은 친구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나, 자신에게만큼은 엄격했다.

 

유의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그는 공직자의 신분으로 청탁에 연루되지 않고자 사사로운 편지는 쌓아놓기만 한 채 뜯어보지도 않았다.
  • 2) 조정에서도 신중한 언행으로 오랜 시간동안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다.
  • 3) 검소함, 위민을 중시하던 그의 위엄은 백성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 4) 정약용은『흠흠신서』를 통해 검소함면서도 강직한 유의의 모습을 기술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검소함면서도 강직한 유의의 모습을 기술했다.

 

유근과 이덕형에 관한 이야기로 옭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이야기 속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 2) 이덕형은 많은 공적을 이뤘으나, 광해군 즉위 이후 모함당해 관직을 삭탈 당했다.
  • 3) 유근은 창의성을 발휘하여 쇄빙선을 고안했으나, 실제로 이를 이행시키기엔 그 전문성이 부족하였다.
  • 4) 유덕과 이덕형은 전문성으로 국가와 백성에 헌신해야 할 공직자의 본분을 실천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발상으로 쇄빙선을 고안한 유근 덕분에 명나라 병사들에게 군량미를 제공하여 조정과 명나라로부터 그 실력과 공적을 인정받았다.

 

황희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을 모두 고르시오.

ㄱ. 황희는 태종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다.

ㄴ. 강원도감찰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자,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기리며 ‘소공대’를 쌓았다는 일화는 백성을 아끼던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다.

ㄷ.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공직자이면서 임금을 알현할 일이 잦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복장만큼은 깔끔하고 좋은 옷감을 입음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다.

ㄹ. 백성을 사랑하고 이루 보살피는 황희의 갸륵한 마음에 감명받은 세종은 비단 옷을 선물했다.

  • 1) ㄱ
  • 2) ㄱ,ㄴ
  • 3) ㄴ,ㄷ
  • 4) ㄴ,ㄹ
  • 5) ㄷ,ㄹ

ㄷ.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자신의 삶에도 반영하여 삶을 간소하게 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겨울 옷이 단벌일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ㄹ. 백성을 사랑하고 이루 보살피는 황희의 갸륵한 마음에 감명받은 세종이 비단을 하사하도록 명하였으나 황희가 이를 거절했다.

 

황희와 박문수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황희는 14세에 음관으로 관리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 2) 27세에 벼슬길에 오른 황희는 도승지 박석명과의 세력다툼으로 잠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 3) 박문수는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 시 책임관으로서 어느 관료보다 능숙한 일처리를 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 4) 박문수는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도승지 박석명은 황희의 인물됨을 일찍 알아보아 승정원에 추천하였고, 이후 황희는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까지 이르렀다.

 

'청백리'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청백리’는 역사 속 조선시대 시행된 관리 표창제도이다.
  • 2) 청백리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관직수행능력을 인정받은 인물들이다.
  • 3) 조선시대 청백리는 관직수행능력만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4) 청백리 제도는 오늘날 각 기관에서도 시행되고 있으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청렴한 공직생활을 권장하고, 바람직한 공직생활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청백리는 관직수행능력과 함께 청렴, 근검, 도덕 등의 덕목을 겸비한 관리를 선정했던 제도이다.

 

정태화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승문원 정자로 벼슬생활을 시작한 정태화는 다섯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 2) 정태화는 이세화에게 종이와 벼루를 직접 가져오도록 하며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공직자의 태도를 깨닫도록 하였다.
  • 3) 평생을 공직에 몸담고 일한 정태화지만, 예송에 휘말린 선비들의 희생은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4) 매사에 예를 갖춰 공무 집행을 했던 그는 심한 중풍 증세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정태화는 이 시기 예송(예절에 관한 논란)에 휘말리기 쉽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홍언필과 정태화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홍언필 일가 묘역의‘곡좌제’는 홍언필과 홍섬이 동서로 굽게 앉아 정사를 논하였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 2)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는 반복적으로 정파 싸움에 휘말려 험난한 관직생활을 반복했다.
  • 3) 홍언필 일가는 권력에 중심이라 칭해도 어색함이 없는 가문이었지만, 화려한 생활을 피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길 대대로 강조하였다.
  • 4) 홍언필과 정태화는 솔선수범의 자세로 자신을 낮추었고, 주변 이들이 그들을 본보기삼아 권위주의를 경계하도록 만들었다.

평소 자신을 낮추기를 몸소 실천했던 정태화는 다섯 차례 영의정을 지내면서도, 정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큰 탈 없이 관직생활을 유지했다.

 

심연원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심연원은 1491년에 태어나 152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 2) 문장에 능하고 세밀한 일처리를 한 심연원은 특히 지리에 밝아 질문을 받으면 막힘없이 응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 3) 경복궁 복구공사를 담당한 심연원은 초라한 궁궐의 모습을 보곤 담당 관리인을 질책하여 궁궐을 다시 꾸미도록 하였다.
  • 4) 심연원은 정의롭지 못한 의논에는 관여조차 안하며 청렴한 태도를 줄곧 유지하였다.

외각의 침실이 색색으로 치장된 것을 본 심연원은 담당 관리인을 잡아 국법을 어긴 죄를 엄히 물었다.

 

황희와 박문수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 1) 정치적으로 소론계열에 속했던 박문수는 영조 즉위년 노론계열이 집권하며 관직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 2) 박문수가 조태채의 아들을 구원한 일화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야 하는 공직자의 바람직한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 3) 27세에 벼슬길에 오른 황희는 도승지 박석명과의 세력다툼에서 이후 큰 세력을 얻었다.
  • 4) 박문수는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을 강조하였다.

도승지 박석명은 황희의 인물됨을 일찍 알아보아 승정원에 추천하였고, 이후 황희는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까지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 1) 임진왜란 때 수군을 담당했던 이순신은 잇따라 승리를 거두며 북상하던 왜군들을 저지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 2) 이순신을 대표하는 또 다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으로 유베 생활을 하는 등 험난한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 3) 이순신은 직속상관의 명령에 뜰 안의 오동나무를 베야하는 심부름꾼을 극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는 자상함을 보였다.
  • 4) 이순신의 직속상관 성박과의 일화 중 “나라의 재산이니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아야 할 공직자의 강직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이순신은 직속상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소유물에 함부로 손 댈 수 없음을 엄중히 알리며 심부름꾼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최부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최부는 1454년 출신으로, 연산군 때 사람이다.
  • 2) 조선 중기 삼림을 대표했던 유학자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추종하는 문인이다.
  • 3) 최부는 1504년 갑자사회 때 참형을 당하였다.
  • 4) 송흠과는 절친한 사이었지만, 개인적인 사행에 역마를 타고 온 모습을 보곤 실망하여 그 뒤로는 다신 만나지 않았다.

송흠과 절친한 사이었던 최부는 송흠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돌아와 정중히 사과하는 송흠에게 후일을 조심해야 한다며 타일렀다.

 

빈 칸에 들어갈 알맞은 말은?

[중요한 건 과거 ‘청백리 제도’로부터 우리가 이어받고자 하는 ‘( )’이라는 개념을 원형을 모방하는 수준인‘복각(覆刻)’차원에서 되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중간 생략) 실제로 정부와 각 지자체도 능력 중심의 성과 배분을 토대로 개인의 역량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제도들을 도입하고 있다. 과거 ( )하기 위해선 청빈해야만 했던 사회는 그야말로 ‘옛말’이 되었다. 그리고‘( ) 韓세상’의 핵심 가치는 ( )이 존중받고, ( )한 사람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 1) 청탁
  • 2) 청렴
  • 3) 헌신
  • 4) 청빈
  • 5) 전통

중요한 건 과거 ‘청백리 제도’로부터 우리가 이어받고자 하는 ‘청렴’이라는 개념을 원형을 모방하는 수준인‘복각(覆刻)’차원에서 되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중간 생략) 실제로 정부와 각 지자체도 능력 중심의 성과 배분을 토대로 개인의 역량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제도들을 도입하고 있다. 과거 청렴하기 위해선 청빈해야만 했던 사회는 그야말로 ‘옛말’이 되었다. 그리고 ‘청렴韓세상’의 핵심 가치는 청렴이 존중받고, 청렴한 사람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심연원에 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의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 1) 심연원신도비에 심연원의 평소 성품과 바른 행실이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청빈함을 확인할 수 있다.
  • 2) 진휼 경차관(조선시대 수시로 특수임무를 띠고 각도에 파견된 특명관)이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 3) 문장에 능하고, 일처리에 세밀하였던 그는 선비를 사랑할줄알았으며, 경복궁 복구작업에서도 고풍스런 인테리어에 신경썼다.
  • 4)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하는 분위기 속에서 청빈한 삶을 강조하며 공무를 집행했던 그의 태도에서 공무원의 올바른 예산 집행법이란 무엇인지 확인해 볼 수 있다.

경복궁 복구작업에서 사치스런 외관을 보고 크게 노하여 경복궁 중건 담당관리인 사위를 잡아들였다.

 

심연원과 김시양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김시양은 160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문원 정자로 벼슬길에 올랐다.
  • 2) 김시양은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을 재조명 받아 다시 중용되기도 하였다.
  • 3) 심연원이 경복궁 재건축을 담당하던 시절, 조선 전체는 온 백성이 생활고를 겪는 등 힘든 시기였다.
  • 4) 김시양과 심연원의 태도로부터 특혜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공무원의 올바른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심연원이 경복궁 재건축을 담당하던 시절은 '호황기'에 해당하여 사대부들 사이에 사치스럽게 권세를 자랑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때였다.

 

'역사 속 청렴이야기'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해당 교육을 통해 청렴한 공직생활을 위한 바람직한 태도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 2) 해당 교육은 청렴에 대한 당대 인식을 확인하는 사료일 뿐, 현대사회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 3) 해당 교육은 청렴한 사람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며, 청빈한 삶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 4)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를 토대로 현대사회의 공직자들을 독려하고자 하는 것이 해당 교육의 목표 중 한 가지이다.

해당 교육은 청렴에 대한 당대 인식을 확인하여 현대사회에서의 청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유근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순탄치 못한 관직생활이었지만, 그의 업무수행 능력은 명나라까지 널리 전해졌다.
  • 2) 광해군 재위 시절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관직을 삭탈 당했다.
  • 3)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복직 요청을 받은 그는 임금을 보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4) 운향검찰사로 임명된 그는 지금의 ‘쇄빙선’에 해당하는 배를 만들었다.

유근은 광해군 시절 관직을 삭탈 당했지만, 광해군 폐위 이후엔 다시 복직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이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다음은 홍언필에 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를 읽고 나눈 대화이다.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 재석: 홍언필은 아들 홍섬이 어린 나이에 관서를 책임지는 판서가 되어서 매우 기뻤을 거야!

- 준하: 맞아.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 하지만 홍언필은 아들이 나졸들을 대동해 초헌을 타고, 벽제를 한 것에 매우 화가 났지.

- 명수: 그건 아버지로서 아들이 일찍 벼슬자리에 앉아서 자칫 권위주의에 빠져 정사를 그르칠 것을 우려한 훈계야.

- 하하: 맞아. 그래서 홍섬의 어머니인 송씨부인도 홍언필과 함께 홍섬의 뒤를 엎드려 좇으며 공직자의 태도를 가르치려 했어.

- 형돈: 그런 부모의 가르침 아래 잘자란 홍섬은 청백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어.

  • 1) 재석
  • 2) 준하
  • 3) 명수
  • 4) 하하
  • 5) 형돈

홍섬의 뒤를 엎드려 좇으며 공직자의 태도를 가르치려 한 것은 홍언필이다.

 

정약용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정약용은 강직한 성품 탓에 유배지를 전전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 2) 오랜 유배생활로 고통 받던 정약용은 아들의 조언에 따라 이기경 대감과 강준흠 대감에게 용서를 구하게 됐다.
  • 3) 잘못된 관행이 이어지던 무과시험을 바로잡기 위해 사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4) 유배지에서도 학술활동에 매진해『맹자요의』, 『흠흠신서』, 『경세유표』등을 저술했다.

정약용은 유배생활 중에도 아들 정학연의 제안을 거절하고, 공직자로서의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박순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대사간이 된 박순은 대사헌 이탁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 2) 당시 윤원형은 권세를 누리며 횡포를 부리고 있어,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 3) 40년에 가까운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박순은 녹봉을 주변 사람들에게 기부하며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
  • 4) 박순은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1565년 명종 20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했다. 이 일화는 박순의 높은 절개를 잘 대변하고 있다.

 

이덕형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 2) 첩의 총명한 모습에 괴로워하던 이덕형은 첩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 3) 첩을 버린 그의 행동에서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공직자의 충절이 돋보인다.
  • 4) 그의 일화에서 「공무원 윤리헌장」의 ‘국가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당시 국가 재정문제와 민란에 휩싸여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던 명나라를 설득해 원군을 파견하도록 만들었다.

 

서유망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서유망은 현실에 타협할 줄 알고 타인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췄다.
  • 2) 서유망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전라도 암행어사, 정언, 대사성을 지냈던 인물이다.
  • 3) 서유망은 예의 법도에 따라 어영대장의 마부를 잡아 가두고 어영대장은 책임을 느끼고 사의를 표했다.
  • 4) 어려서부터 독서에 정진하여 뛰어난 문장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의 아버지와 더불어 청직(淸職)의 전통을 세웠다.

관료로써 위계질서가 있는 사회에서 일하다 보면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인데도 윗사람의 의견에 맞추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유망은 이러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황희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황희는 조선시대 최장수 재상으로도 기록됐을 만큼 화려한 정치경력을 소유하고 있다.
  • 2) 강원도감찰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를 기리며 백성들이 ‘소공대’를 쌓았다고 한다.
  • 3) 해진 옷을 입고 임금을 알현할 수 없어 비단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 4) 세종은 황희에게 비단을 하사하고자 하였으나, 황희는 이를 거절하였다.

한 벌 뿐인 겨울옷이 해져 입을 수 없자 솜을 몸에 두르고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이 이를 안쓰럽게 여겨 비단을 하사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힘들어하는 백성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약동과 이시백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이약동은 백성들을 아끼기로 유명했고, 제주도의 한라산신제단은 이를 잘 보여주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 2) 이시백은 아버지와 함께 역적으로 몰려 관직을 반납해야 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 3) 이약동과 이시백의 모습에서 금품 및 향응을 대하는 공직자의 바람직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 4) 이시백이 살던 시절엔 조선에는 사신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는 관례가 있었다.

이시백은 유생의 신분으로 아버지와 같이 인조반정으로 공을 세워 연양군에 봉해지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약동에 관한 역사 속 청렴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오늘날 정년퇴임과 같은 ‘치사’를 하기 까지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 2) 제주목사로 부임하며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그를 많은 이들이 존경했다.
  • 3) 백성들이 감사의 뜻으로 선물한 말채찍은 집안의 가보로 고이 모셔두었다.
  • 4) 제주 지역에 부임해 공물을 가로채는 관리들을 바로잡아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부조리를 바로잡았다.

이약동은 백성들이 감사의 뜻으로 선물한 말채찍을 임기가 끝나자 관아에 걸어 놓고 떠났다.

이주국에 관한 이야기로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1) 정조는 이주국의 활쏘는 모습을 보고‘오백’이라는 당호를 하사하였다.
  • 2) 훈련대장을 사직하면서도 이주국은 ‘군제삼사’를 올리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 3) 건장한 용모와 강직한 성품은 문신들마저 그를 따르도록 만들었다.
  • 4)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다 숨진 병사를 위해 그의 가족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강직한 성품은 이주국이 문신들로부터 여러 차례 모함을 받도록 하였다.

서유망과 백인걸에 대한 역사 속 청렴이야기로 맞는 것을 모두 고르시오.

ㄱ. 서유망은 태학장의의 자리에서 지기급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잘못된 것은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며 공정한 직무수행을 하였다.

ㄴ. 서유망은 위계질서가 있는 사회에서 일하다 보면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인데도 윗사람의 의견에 맞추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러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ㄷ.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간, 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ㄹ. 백인걸과 친한 사이었던 허자는 요령 있는 태도로 권세를 누렸다.

  • 1) ㄱ,ㄴ,ㄷ,ㄹ
  • 2) ㄱ,ㄷ
  • 3) ㄱ,ㄴ,ㄷ
  • 4) ㄱ,ㄹ
  • 5) ㄱ,ㄴ,ㄹ

다음 설명이 맞으면 O, 틀리면 X를 선택하시오.

[훈련대장을 사직하면서도 이주국은 ‘군제삼사’를 올리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으며,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다 숨진 병사를 위해 그의 가족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정답 : O

훈련대장을 사직하면서도 이주국은 ‘군제삼사’를 올리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으며,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다 숨진 병사를 위해 그의 가족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권위란 `자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공무원의 권위주의란 달리 `관료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료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것을 `틀리다`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정답 : O

권위란 `자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공무원의 권위주의란 달리 `관료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료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것을 `틀리다`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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